[기획] '백신 자급자족' 영국의 성공 비결 (上)

-정부의 신속정확한 의사결정에 주목

2021-08-13     최유진 기자


백신 수급문제로 국내외 코로나19 상황이 여의치 않다. 최근 델타변이의 확산으로 백신이 코로나19를 종식시킬 것이라는 기대는 다소 희석되었지만, 백신수급률이 낮은 나라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배부른 소리라는 불평도 나온다.

적어도 백신수급률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국가는 현재까지 매우 소수다. 화이자와 모더나를 개발한 미국을 포함, 매우 소수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그들이 어떻게 백신의 자급자족에 성공했는지도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워낙 세계 제약, 바이오 시장을 장악한 미국 이외의 사례를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바로 영국의 이야기다.

◇영국 제약산업, R&D와 세일즈에 집중

물론 영국은 의약 산업 강국으로 명성이 높다. 제약 산업 다방면에 걸쳐서 고루 뛰어난 연구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덕분에 백신 산업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수 있었다는 평가다. 가령 GSK의 백신 연구개발 능력은 세계적으로도 워낙 유명하다. 아울러 아스트라제네카 사에 IP를 제공해 코로나19 백신을 대량 생산하고 있는 제너 인스티튜트 역시 오랜 시간 동안 벡터 방식 백신만을 연구해 온 기관이다.

하지만 영국의 제약 산업은 R&D와 세일즈에 집중돼 있다. 특히 작년까지만 해도 영국에는 백신을 자체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작년 2~3분기, 영국 정부가 백신 제조사와 백신 구매 계약을 체결할 때, 각 부처 장관들과 실무자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실제로 영국 정부는 웃돈을 얹어주고 백신 제조사로부터 빠르게 백신을 구매해 올 수도 있었다. 바로 이스라엘이 취했던 방법이다.

그러나 영국은 이외의 방법에 주목했다. 바로 백신을 전략 물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즉 영국 인구에 사용할 백신은 무조건 영국 내에서 영국 보급망을 이용해 제조되도록 하는 방안이다.

◇영국정부, 신속정확 의사결정

정부는 두 번째 방안을 채택하기로 했다. 이것은 정부의 백신 구매 계약을 체결하는 '백신 태스크 포스'의 워게임 시나리오에서 권고된 방안이기도 했다. 당시 태스크 포스는 백신이 처음 승인돼 접종되기 시작할 때 막대한 보급망 상의 혼란이 있을 것으로 예측했고, 이로 인해 어떤 국가는 자국 보급망을 일체 차단하거나 훼방할 우려가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우려는 결국 사실로 드러났는데, 실제로 EU가 최근 영국의 보급망을 차단하려고 했던 시도가 대표적이다. 태스크 포스의 목표는 결국 백신을 영국 내에서, 영국 보급망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어떠한 외부 방해와 상관없이 영국 프로젝트는 영국 내에서 진행되는 것이 핵심이었다.

로드맵은 이렇게 갖춰졌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영국에는 2020년까지만 해도 가시적으로 백신을 대량 제조할 수 있는 플랜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국의 의약산업 강국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새로운 백신을 만들어서 시중에 공급할 수 있는 일은 전문 기술뿐 아니라, 산업 전반의 광범위한 인프라를 요했다.

대체로 의약산업은 총 세 개의 시설로 나뉜다. 첫 번째는 R&D. 과학자와 연구자들이 실험을 하는 대형 시설을 말한다. 두 번째는 백신 물질 생산 시설을 꼽을 수 있다. 한 번에 1000~2000리터의 백신 물질을 제조하는 시설이다. 마지막으로는 엔드 프로덕트다. 생산된 백신을 약병에 나눠 담아 실제 제품으로 만드는 시설이다. 이는 종종 사용 허가 인증 테스트를 겸한다.

영국 내에 초대형 의약 연구 시설이 클러스터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실제 만들어진 바이오 제품의 상태를 테스트하고 인증 허가를 내리는 우수한 기관이 있다는 점 역시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영국에는 백신 물질을 만들고, 이를 실제 제품으로 만들 수 있는 시설이 존재하지 않았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영국의 바이오 산업계에게 자문을 받았다. 어떻게 하면 1~2년 안에 영국 땅 내에서 백신 대량 생산을 가능케 할 지에 대해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테스크 포스를 중심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가 오고 가던 와중에, 한편 제너 인스티튜트는 자신들이 개발하는 바이럴 벡터 방식 백신에 맞춰, 임상시험을 하고 대량생산을 해줄 업체를 찾고 있었다. 실제로 처음 제너가 고려하던 업체는 독일 화학&제약업체였던 머크로 알려졌다.

◇영국정부의 '매치메이킹' 주도

여기에 영국 정부가 개입했다. 영국 정부는 제너로 하여금 영국에 본사를 둔 회사와 계약을 해달라고 지시했다. 이번 백신 개발에 영국 정부의 자금이 상당량 투자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울러, 영국 정부는 자국에 본사를 둔 회사와 파트너쉽을 맺도록 '매치메이킹'을 주도했다. 이로써 제너는 백신이 주력 산업도 아니고 백신 생산 경험도 없는 아스트라제네카와 파트너쉽을 맺게 되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사실 백신 산업과는 거리가 먼 업체였다. 오히려, 영국의 백신 제조업체로 유명한 곳은 GSK로, 흔히들 세계 최대의 백신 업체로 알려져 있다. 다만 GSK는 프랑스 사노피와 손잡고 백신을 실험 중에 있었기에 영국 정부의 선택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GSK와 시노피의 합작 백신은 임상 2상을 못 넘긴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제너는 자사 제품 생산에 필요한 여러 화학 물질 정보를 잘 알고 있었고, 이를 아스트라제네카와 공유함으로써 보급망 구축에 돌입했다. 이와 함께 아스트라제네카는 영국 생산 백신에 쓰일 공장과 보급망을 개별적으로 구축하는데 주력했다.

이때 백신 태스크 포스는 아스트라제네카와 1억 정의 백신을 주문하면서, 계약 조건에 '영국 보급망에서 생산되는 제품은 1차적으로 영국 정부에 향한다'는 이른바 브리튼 퍼스트 조항을 추가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태스크 포스는 백신 보급망을 전략 물자화하는데 성공했다.

보급망이 구축됐으니, 이제는 플랜트가 필요하다. 이와 관련해 운이 작용한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영국 정부가 마침 지난 2018년, 산업 전략의 일환으로 백신 생산 플랜트인 VMIC(백신 매뉴팩처링 이노베이션 센터) 건설을 허가한 일이 있었다. VMIC는 풀 가동 시 한 해 ~2억정 가까운 백신을 생산할 수 있는 대형 백신 위탁생산 법인을 일컫는다.

VMIC는 원래 2022년에 완공될 예정이었지만, 영국 정부는 우선 VMIC에 추가 예산을 긴급 수혈한 뒤, 완공 및 가동을 2021년 하반기로 단축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VMIC 가동을 위해 고용된 인력들을 아스트라제네카에 전진 배치함으로써 임시 플랜트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옥스퍼드에 위치한 벤처 기업인 '옥스퍼드 바이오메디카'라는 진 테라피 전문 기업이 큰 보탬이 되었다. 바이오메디카 사에게는 최근 막 완공된 클린룸이 있었는데, 이를 알아 본 영국 정부는 이 클린룸을 아스트라제네카에게 대여해 줄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다리를 놓아 주었다. 클린룸이란 온도, 습도, 공기량, 공기압, 조도 등에 관해 환경적으로 제어되는 밀폐된 공간을 말한다.

이렇게 아스트라제네카는 빠르게 백신 제조에 필요한 각종 시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렇게 2020년 3분기까지 영국 내 흩어져 있는 작은 생산시설을 백신 엔드프로덕트용 시설로 바꾸는 작업을 마쳤고, 4분기부터 생산에 들어갔다. 생산은 무리없이 진행되었고, 올해 상반기 무렵 완벽히 자급자족이 가능한 상태로 전환되었다.

종합해서, 영국은 단 2년 만에 캐퍼시티 0에서 글로벌 메이저 백신 대량 생산국으로 떠올랐다. 2022년부터는 VMIC와 각종 중소규모 플랜트에서 만들어진 백신을 직접 수출하거나, 원조기금을 통해 개도국에 무상 지급할 예정이다. (계속)